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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구석기시대의 생활과 사회 모습 총정리

한국늑대 2020. 11. 15. 11:32

 한반도에서의 구석기시대는 70만 년 전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하는 시점인 8,000년 전까지의 시기가 되겠습니다. 또는 1만 2,000년 전부터 8,000년 전 사이의 시기를 중석기 시대로 별도로 구분하여, 70만 년 전부터 1만 2,000년 전까지를 구석기시대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구석기시대의 시작점을 70만 년 전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구석기시대 유적이 70만 년 전으로 유추되기 때문인데요. 그곳은 바로 충청북도 단양군의 금굴이라는 동굴로, 구석기시대의 대표 유적으로 자주 언급되기도 하죠. 이것은 곧 더 오래된 유적이 발견된다면 구석기시대의 시작점이 더 빨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답니다.

 

구석기시대의 자연환경

 구석기시대는 엄청난 과거일 뿐만 아니라 그 기간 역시 엄청나게 길기 때문에 자연환경 역시 지금과는 다르고, 같은 시대 내에서도 환경이 변화하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구석기 유적들에서는 북방계 동물과 남방계 동물의 화석이 같이 발견되기도 하며, 덩치가 큰 동물과 덩치가 작은 동물이 섞여서 발견됩니다. 보통 기온이 낮아지면 느리지만 덩치가 커 체온 유지에 유리한 동물들이 득세를 하고, 반대로 기온이 올라가면 작고 날랜 짐승들이 번성하죠? 즉, 구석기시대에는 추운 빙하기와 온화한 간빙기(빙하기와 빙하기 사이의 따뜻한 시기)가 번갈아 나타난 환경이며, 이는 곧 자연환경의 변화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시대의 의식주 생활과 구석기인들이 사용한 도구들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줄 몰랐기 때문에 동물을 사냥하고(수렵), 나무 열매나 뿌리를 채집하며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초기에는 불이 없어 날것을 먹을 수밖에 없었으나 불을 발견하고 사용한 뒤로는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하였죠. 당시에는 발달된 도구나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풍요롭지 못했고, 사냥이나 채집 결과가 신통치 못하면 굶어야 하는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사냥과 채집이 주된 음식 획득 방법이다 보니 구석기시대의 사람들은 이동 생활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굳이 정성스레 집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비바람과 추위를 막아줄 공간만 있으면 되었죠. 그래서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생활하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막집은 바위 그늘이나 강가에 나무줄기 같은 것을 얽어 만든 집인데요. 사냥감을 주위에서 찾을 수 없거나 더 이상 채집할 식물들이 없을 때 또 이동해야 하니까 간단하게 임시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의생활을 살펴본다면, 당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의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그저 잡았던 동물의 가죽을 벗겨 걸쳐 입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죠. 별도의 직조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석기시대는 뗀석기를 주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뗀석기란, 돌을 깨뜨려서 떼어낸 돌 도구인데요. 뗀석기로 만들고 싶은 돌에 물리적 충격을 줘서 떼어낸, 만들어낸 도구이기 때문에 뗀석기라고 부릅니다. 또, 뗀석기는 타제석기라고도 하는데요. 간접적 또는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타격을 가해 만든 석기이기 때문에 때리다, 치다의 의미를 가진 '타' 한자를 사용한답니다.

 대표적인 뗀석기에는 주먹도끼가 있습니다. 주먹도끼는 주먹에 움켜쥐고 날카로운 부분을 대상물에 찍는, 도끼 모양의 돌 도구입니다. 신석기시대의 간석기와 비교하였을 때 보다 원초적이며 절단면이 불규칙적입니다. 가공 기술이 부족하니 당연한 결과이지요. 주먹도끼는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는 구석기 유물입니다. 특히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유적이 유명한데, 이는 서양이나 아프리카에서만 그동안 발견되어왔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출토된 장소이기 때문이지요.

연천 전곡리에서 출토된 주먹도끼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166331) 

 그리고 구석기시대의 석기는 크게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합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구석기인들은 기존에 하나의 석기를 여러 방면으로 사용하다가 점차 쓰임새가 구별된 다양한 석기를 사용하게 되는데요. 구석기 전기로 구분되는 초기에는 큰 석기 하나, 예를 들면 주먹도끼를 가지고 사냥도 하고, 가죽도 벗기고, 땅을 파거나 식물 뿌리를 캐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기가 되면 큰 몸돌에서 떼어낸 1차 생산물인 격지들을 잔손질을 거쳐 도구로 사용하게 되었고, 나중에 후기에는 모양이 같은 여러 개의 돌날 격지(돌날 모양의 석기)를 만드는 등 점점 석기의 크기가 작아졌고 쓰임새가 분명해졌답니다.

 

구석기시대의 사회상과 예술

 구석기인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동물들이나 덩치가 큰 동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였기 때문에 무리를 이루어 이동생활을 했습니다. (무리 사회) 리더는 그 무리 중에서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맡았으나, 권력이 부여되지는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사냥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아 항상 먹는 것이 풍요롭지 못했고, 먹고 남은 잉여 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아 함께 힘을 합쳐 사냥을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동등하게 결과물을 나누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이에 구석기인들은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죠. 풍요 속의 평등사회가 아닌, 모두가 배고픈 평등사회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여러 원초적인 욕망을 예술로 표현하였는데요. 현재 발견되는 벽화나 조각품들에는 어떤 주술적 의미가 깃들어 있을 것이라 해석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래나 물고기, 짐승들이 많이 그려져 있는 동굴 벽화를 통해 구석기인들이 사냥감의 번성을 빈 것이라 유추하고 있습니다. 또는 뚱뚱한 체형의 여신 조각 유물을 통해 구석기인들이 자손을 많이 낳을 수 있고 많이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다산과 풍요에 대한 욕구를 조각상으로 표현했다고 이해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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